공급망 너머의 책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는 윤리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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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10-20 08:58 조회1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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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 너머의 책임: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는 윤리경영

 

"우리 공장은 깨끗한데, 왜 우리가 책임져야 하나요?" 제조업체에서 터진 협력사 인권 문제로 곤욕을 치르는 기업들이 꽤 있습니다. 자사의 윤리경영 수준은 높다고 자부했지만, 2차 협력사에서 발생한 문제가 결국 자사의 평판에 직격탄이 되는 경우들도 있죠. 이제는 우리 울타리 안만 관리한다고 끝나는 시대가 아닙니다. 저 멀리 원자재를 캐는 광산까지, 책임의 범위가 근본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2025, 글로벌 공급망 실사 의무화는 더 이상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EU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과 독일 공급망 실사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이제 자사의 경계를 넘어 공급망 전체의 인권과 환경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니라, 윤리경영의 영역이 공간적·시간적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공급망 실사가 던지는 본질적 질문

공급망 실사(Due Diligence)의 핵심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과거 기업들은 "우리는 직접 고용한 직원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2, 3차 협력사의 노동환경, 원자재 생산지의 환경 파괴, 심지어 분쟁 지역의 광물 채굴 과정까지도 기업의 책임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한 자동차 부품 중소기업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EU에 수출하는 대기업 고객사로부터 갑자기 우리 회사의 ESG 실사 자료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품질과 납기만 지키면 됐는데, 이제는 우리가 쓰는 원자재가 어디서 왔는지, 우리 직원들의 근무환경은 어떤지까지 증명해야 합니다." 공급망 실사는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된 모든 기업이 윤리경영의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투명성이라는 새로운 경쟁력

흥미로운 점은, 공급망 실사 의무화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금융기업은 AI 대출 심사 시스템에 '공정성 지표'를 도입하고, 대출 승인률을 성별·연령대·지역별로 정기 분석하여 편향을 제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또한 대출 거절 사유를 고객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는 '설명 가능한 AI'도 도입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자, 오히려 고객 신뢰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공급망의 투명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섬유 기업은 자사 제품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공급망 지도'를 홈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면화가 재배되는 농장부터 염색 공장, 봉제 공장까지의 노동환경과 환경 영향을 투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처음에는 리스크 노출을 우려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소비자들은 "정직한 기업"이라며 더 많은 신뢰를 보냈고, 판매량도 증가했습니다.

 

윤리는 관계의 확장

공급망 실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윤리는 관계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기업은 더 이상 독립된 섬이 아닙니다. 우리가 거래하는 협력사, 그들이 또 거래하는 원자재 공급업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그 지역의 환경까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곳에서의 비윤리가 전체 공급망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공급망 전반을 파악하는 '가시성(Visibility)' 확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거래하는 1차 협력사뿐 아니라, 2, 3차 협력사까지 어떤 기업들이 있는지 데이터화해야 합니다. 둘째, 단순히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십' 관점이 중요합니다. 중소 협력사에게 ESG 교육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개선 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안정적인 공급망을 만듭니다. 셋째, 블록체인 등 기술을 활용한 '추적 가능성(Traceability)' 시스템 구축도 고려해야 합니다.

 

책임의 범위를 다시 묻다

결국 공급망 실사는 "우리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법은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하지만, 진정한 윤리경영은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제 기업들은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이면에 누군가의 고통이 숨어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이익이 저 멀리 어딘가의 환경 파괴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우리는 책임 있는 파트너인가?"

공급망 실사 시대의 윤리경영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책임지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야말로,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가장 현명한 투자입니다. 

 

윤리경영 칼럼 / 2025년 10월​

세종윤리연구소

최보인 박사​